채용공고를 읽다가 불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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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재취업을 준비하면서 채용공고를 꽤 봤습니다.

그러다 좀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요구사항이 대부분 아는 것들이었거든요. 써봤고, 이력서에도 적을 수 있는 것들. 그런데 한 줄씩 짚어 내려가면서 “이거 지금 설명해보라고 하면 되나?” 싶으니까 답이 안 나오는 게 계속 나왔습니다.

모르는 건 아니었습니다. 알았던 것 같은데 흐려져 있었던 거죠.

그 느낌이 어디서 왔는지는 대충 짐작이 갔습니다.


1년 4개월 동안 있었던 일

직전 회사에서 1년 4개월 동안 Web3 프론트엔드랑 크리에이터 플랫폼을 혼자 만들었습니다. 디자이너도 기획자도 사수도 없었고요. 20여 개 페이지를 만들고, 지갑 붙이고, 결제 처리하고. 그런 일들이었습니다.

물어볼 사람이 없으니까 AI가 사실상 동료였습니다. 기존 코드베이스를 AI로 분석해서 구조를 파악하고, 화면을 만들고, 고치고, 다듬었습니다. 그게 틀린 선택이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솔직히 그 상황에서 다른 방법이 있었나 싶기도 하고요.

결과물은 나왔습니다. 서비스는 돌아갔고 사람들이 썼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일을 쉬면서 돌아보니까, 결과물이 나온 만큼 제 안에 남은 게 있진 않더라고요.

빠르게 만들어지는 만큼 “왜 이렇게 되는가”를 건너뛰기가 너무 쉬웠습니다. 돌아가면 넘어갔거든요. 돌아가니까요.


저만 그런 게 아니더라고요

이게 저만의 문제인지 궁금해서 좀 찾아봤습니다.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한 주니어 풀스택 지원자는 기술면접에서 기존 애플리케이션에 기능을 직접 구현해보라는 요청을 받고 완전히 얼어붙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 이미 실제 사용자가 있는 제품을 여러 개 만들어서 배포한 개발자였습니다. 본인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소프트웨어를 어떻게 만드는지, 구조를 어떻게 잡는지, 디버깅을 어떻게 하는지 압니다. 그런데 AI 없이 빈 에디터에서 시작하려니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Reddit)

더 인상적이었던 건 회사 지시로 그렇게 된 경우입니다. 어떤 개발자는 8개월 전 회사 디렉터 방침에 따라 모든 개발을 Claude Code로만 하게 됐다고 해요. 그 기간에 웹 프로젝트랑 iOS·안드로이드 앱을 만들었고요. 그가 쓴 문장이 오래 남았습니다.

“이론적으로 저는 이제 모바일 앱 다섯 개를 만든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가 뭘 만들었고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이해가 여전히 없습니다.”(Reddit)

이력서는 채워졌는데 사람은 안 채워진 상태인 거죠.

Hacker News에 “AI 코파일럿이 우리 프로그래밍 실력을 갉아먹고 있는가”라는 스레드가 있는데, 거기 한 개발자가 자기 코딩 실력이 눈에 띄게 떨어졌다고 적었습니다. 지금 일을 못하는 건 아닙니다. LLM으로 계속 일하고 있어요. 다만 순수 개발직으로 이직하려면 몇 달 연습이 필요할 것 같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실직에 대비해 1년치 생활비를 따로 빼뒀다고 하더군요.(Hacker News)

이 사람들 공통점이 있습니다. 일을 안 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오히려 반대죠. 만들었고, 배포했고, 회사가 요구한 걸 해냈습니다.


먼저 사라지는 건 문법이 아니었습니다

AI 의존 얘기를 하면 보통 “문법을 잊어버린다”를 떠올리는데, 제 경우엔 그게 아니었습니다.

먼저 사라진 건 오류 앞에서 버티는 시간이었습니다.

예전엔 에러가 나면 로그를 읽었습니다. 어디서 터졌는지 추측하고, 검색하고, 가설 세우고, 고치고, 틀리고, 다시 세우고. 굉장히 비효율적이죠. 그런데 문제 해결 능력은 정확히 그 비효율 안에서 만들어지더라고요.

AI를 쓰면 이 구간을 건너뛸 수 있습니다. 에러 복사해서 붙여넣고, 고쳐진 코드 받고, 실행하고. 또 에러 나면 또 붙여넣고. 결국 돌아갑니다.

근데 프로그램의 문제가 해결된 것과 내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 건 다른 일이잖아요.

한 시니어 개발자가 최근 뽑은 주니어 두 명을 관찰한 기록이 이 장면을 정확히 묘사합니다. 둘 다 면접 잘 통과했고 코드도 빠르게 짠다고 해요. 그런데 뭔가 깨지면 디버깅을 안 하고 에러를 ChatGPT에 붙여넣는답니다. 안 되면 새 에러를 또 붙여넣고요. 그중 한 명이 그렇게 네 번 반복하는 걸 보다가 스택 트레이스 읽는 법을 알려줬더니, 그런 걸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는 겁니다. 코드 리뷰에서 “왜 이렇게 짰어요?” 물으면 대답이 안 나온다는 얘기도 있고요.(Reddit)


회사 안에 있으면 잘 안 보입니다

이게 좀 고약한 지점입니다. 부채가 쌓이는 동안 지표는 오히려 좋아지거든요.

지금의 생산성에는 사실 여러 개가 섞여 있습니다. 나의 능력, AI, 회사 코드베이스, 익숙한 도메인 지식, 옆자리 동료, 회사가 세팅해둔 개발 환경. 이게 전부 합쳐져서 결과물이 나옵니다.

퇴사하면 이 중 상당수가 사라지죠. 그리고 다음 회사 면접관은 그걸 전부 걷어낸 상태에서 묻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뭘 할 수 있습니까?”

저는 그 질문을 면접장이 아니라 채용공고 앞에서 먼저 받았습니다. 그건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AI 쓰지 말자”는 아닙니다

여기서 얘기가 좀 뒤집힙니다.

한 개발자는 AI 솔루션을 직접 만드는 사람이었는데, 도구가 자기 사고를 대체하는 게 싫어서 Copilot 같은 걸 작업 환경에 안 붙였다고 합니다. 기술면접은 통과했고요. 그런데 이후 대표랑 면담하면서 그 얘기를 하다가, 생산성 도구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탈락했다고 적었습니다.(Reddit)

반대 방향 기록도 있습니다. 미들급 백엔드 면접에서 지원자가 “AI 써도 된다”는 말을 함정이라고 생각하고 직접 코드를 쓰기 시작했더니, 면접관이 5분쯤 만에 멈춰 세웠다고 해요. 도구 없이 어떻게 하는지가 아니라, 도구를 쓸 때 어떻게 하는지를 보고 싶다고요. 실제 평가 대상은 생성된 코드를 어떻게 검증하고 버그를 어떻게 잡아내는지였습니다.(Reddit)

그러니까 앞으로의 구분선은 AI를 쓰는 사람과 안 쓰는 사람 사이가 아닐 겁니다.

AI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AI 없이도 문제를 이해하지만 AI를 쓰면 몇 배 빨라지는 사람, 그 사이겠죠.


남는 질문

기술 부채라는 말이 있죠. 당장 빠르게 가려고 진 빚을 나중에 이자까지 쳐서 갚는 것.

경력에도 비슷한 게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일은 빨리 끝나고, 야근도 줄고, 성과도 나쁘지 않습니다. 비용은 나중의 내가 냅니다. 회사를 옮길 때, 낯선 코드베이스 앞에 섰을 때, 지금 쓰던 도구가 없는 환경에 던져졌을 때.

그래서 요즘 저한테 더 무거운 질문은 “AI가 내 일자리를 가져갈까”가 아닙니다.

AI와 함께 일한 지난 시간이, 내 경력에도 그만큼 남아 있는가.

가끔은 이렇게도 물어봅니다.

지금 AI를 끄면, 나는 여전히 이 일을 할 수 있는가.

지난달의 저는 여기에 자신 있게 답을 못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걸 쓰고 있고요.

사실 이 블로그도 거기서 시작했습니다.

흐려진 걸 다시 붙잡으려면 어딘가에 적어두는 수밖에 없더라고요. 머릿속에만 있으면 아는지 모르는지 구분이 안 됩니다. 그런데 글로 쓰려고 하면 금방 들통나거든요. 설명이 안 되면 모르는 거니까요.

그래서 여기엔 흩어져 있던 것들을 하나씩 옮겨 적어두려고 합니다. 정리해서 남기는 김에, 어디까지가 아직 제 것인지도 같이 확인해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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